증강현실과 가상현실, 그리고 디지털 트윈
요즘 하루가 멀다시피 신조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일상의 유머에서부터 정치나 사회에 이르기까지 다 그렇다. 최근, 여러 분야에서 많이 언급되는 메타버스나 디지털 트윈도 사회적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용어들이다.
이런 신조어들은 어찌 보면 뭔가 학문적으로 심오할 것 같고, 달리 보면 약간 상업성을 풍기기도 하지만 여하튼 우리에게 어느새 익숙해지고 있는 용어들이다. 사실, 메타버스나 디지털 트윈은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또 다른 익숙한 용어들의 변주다.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과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이 바로 이들의 뿌리에 해당한다.
전통적으로 말하는 AR은 눈으로 보는 실제 세상의 광경에 부가 정보를 얹어서 보여주는 기술이고, VR은 사람의 시야에 오로지 가상의 세상 즉, 컴퓨터 그래픽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 다, 시각을 위주로 발달하긴 했지만, 거기에 청각 즉, 음향 정보는 원래 같이 들어 있었거나 부가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하면서 AR과 VR에는 어느새 사람 오감의 나머지인 촉각이 거론되고 있고 미각과 후각도 같이 연구되고 있다.
AR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1900년에 등장한 소총용 반사 조준경(reflector sight)이 그 시초다. 가늠자와 가늠쇠를 이용해서 목표를 조준하던 방식을 넘어, 저 멀리 떨어진 목표물 부근에 광학적인 조준점을 띄워주는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소총용 도트 사이트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컴퓨터 기술과 결합하면서 전투기의 HUD(Head Up Display)로 발전한다.
VR의 등장에서부터 MR(Mixed Reality)까지
VR은 CG(Computer Graphic)가 등장하면서 가능해졌다. 최초의 CG가 곧 VR의 시초라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컴퓨터 및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AR과 VR은 그 경계가 다소 모호해지기 시작한 부분도 생겼다. 이스라엘 방산 회사의 상표명인 Iron Vision이 그 예다. 장갑차 안에 앉은 병사는 위험하게 몸을 밖으로 내밀 필요 없이 차량 주위에 달린 카메라 영상을 자신의 고글 위에 그대로 띄우면서 목표물의 위치 등을 부가적으로 파악해서 볼 수 있다.
불연속적으로 배치된 카메라의 영상 정보는 컴퓨터에 의해 연속적으로 처리된 후 병사의 고글로 보내진다. 더구나, 기능에 따라서는 원래 사람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었던 적외선 등의 영상도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컴퓨터가 처리한 화면을 본다는 것은 원래는 VR의 영역이다. 그런데 가상 공간이 아닌 실제 세상을 본다.
이걸 두고 굳이 AR이냐, VR이냐 용어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새롭게 등장한 단어가 MR(Mixed Reality, 혼합현실)이다.
이러한 첨단 기능은 전투기에도 이미 쓰인다. F-35 전투기에는 상하/좌우/전후 여섯 방향을 보는 고정형 카메라가 있고 이를 이용하여 조종사가 고개를 돌리는 방향에 맞추어 모든 시야를 끊김 없이 제공한다. 이쯤에서, ‘이미 자동차에도?’라고 생각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상당수 자동차 모델에 이미 사용되고 있는, 주차에 특히 편리한 어라운드 뷰 기능이 바로 MR의 일종이다.
항공우주 분야의 메타버스와 디지털 트윈, 그리고 수학-물리
메타버스나 디지털 트윈은 이로부터 한 발 더 나간 기술이다. 메타버스는 실제 우주(universe)가 아닌 가상의 세상(metaverse)을 실생활과 연결하겠다는 것이며, 디지털 트윈은 세상의 일부를 가상 공간 안에 그대로 구현하겠다는 기술이다.
이 중 디지털 트윈은 항공우주 분야가 그 기술을 선도했던 시뮬레이션 기술을 근간으로 한다. 시제 항공기나 우주선을 만들어 바로 비행을 하기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많으니 방대한 실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실제로는 이렇게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것이 시뮬레이션의 본질이다. 과거에는 특히 컴퓨터 성능 제약으로 인해, 항공기의 기동성이나 비행 안전성만을 예측하는 등의 일부분 시뮬레이션에 그쳤지만, 지금은 항공기의 가능한 모든 요소들을 가상 공간 속에 집어넣고 여러 다양한 시험을 컴퓨터 속에서 미리 함으로써 발생이 예상되는 거의 모든 상황을 보겠다는 것이 디지털 트윈이 지향하는 바다.
항공우주 분야에서 보는 디지털 트윈은 절대로 전자오락이 아니다. 결코 그래서도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세계를 표현하는 모델링이 얼마나 정확한가이다. 여기에는 온갖 종류의 역학이 들어간다. 공기역학, 구조역학, 동역학 등등. 그리고 이 모든 역학의 기반에는 물 리가 있다. 정보통신 기술 중 특히 암호와 빅데이터 및 인공지능에서 수학이 기초학문으로 강조되듯이, 항공우주 분야의 디지털 트윈 산업에서는 물리학적 기초가 정말 중요하다.
중고등 과정에서 물리와 수학에 재미를 들이고, 대학에 와서는 기초 과학 전공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학 과정에서 수학과 물리의 심오함을 배우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학문이 학문 본연으로서가 아닌 입시 도구나 취업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정말 앞선다.